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아베 노부유키 (문단 편집) == 생애 == 아베 노부유키는 [[1875년]] [[11월 24일]], [[이시카와현]] 가나자와시에서 태어났다. 일본 [[육군대학교]]를 졸업하였고 [[1923년]] [[관동대지진]] 때 계엄사령부 참모장으로 부임했으며 이후 육군차관과 대장 직무대행을 거쳐 사단장으로 부임하였고 [[1933년]] 육군대장으로 승진하였다가 [[1936년]] 군부에서 [[전역]]신고를 하였다. || {{{#!wiki style="margin:-5px -10px" [[파일:external/www.kantei.go.jp/souri36.jpg|width=100%]]}}} || || 36대 총리 취임 후 || [[1939년]] [[히라누마 기이치로]] 전 총리의 후임으로 내각총리대신이 되었다. 의회주의를 표방하던 민정당/정우회 양당의 협력을 구하여 전쟁으로 치닫는 정세에 대응하고자 했으나, 군국주의적 분위기로 치닫던 의회가 도리어 총리에게 불신임을 던져버려서 물러나야했다. 총리 사임 직후, 중국으로 파견되어 일화신관계조정요강의 체결에 참여했고, 1940년까지 [[왕징웨이 정권]] 대사를 지내다가 귀국, 1942년 귀족원 의원으로 칙임되었고 명예직인 익찬정치회(翼賛政治会) 회장에 선출된다. 그러다가 [[1944년]] 전임 조선총독인 [[고이소 구니아키]]가 내각총리대신으로 임명되면서 그의 후임으로 9대이자 마지막 최후의 조선총독으로 부임하였다. 재임기간이 1년밖에 되지 않았던 데다가 마지막 조선 총독이긴 하였지만, 전임자 못지않은 온갖 강경책와 폭정책으로 조선에서 온갖 물자와 인력의 수탈 및 징집을 무자비하게 강행했으며 국민의용대를 제창하여 조선의 애국자 및 독립운동가 색출에 총력을 벌이기도 하여 마지막까지 식민통치의 철권을 휘두르고 다녔다. [[1945년]] 8월 [[만주 작전|소련의 침공]]으로 한반도 북부 일부([[함경도]] [[청진]] 등)를 실질적으로 상실하였고 이후 여운형 등과 협의하여 건국준비 위원회를 완전히 설립하도록 하였지만, 군권은 여전히 가지고 있었다. [[8월 15일]] 덴노의 항복 선언과 함께 한반도는 해방되었다. 그러나 총독부가 곧바로 해산되지는 않았다. 한반도의 북반부는 소련군에 의해서 점령과 일본군의 무장해제가 진행되었지만 남반부에서는 조선 치안 유지를 위해 미군이 도착할 때까지 일시적으로 조선총독부 및 산하 행정기관을 유지했다. 패망 이후에도 총독 직위를 유지하고 있던 아베는 9월 [[미군]]이 [[서울]]에 진주하게 되자 최후의 수단으로 [[할복]]을 시도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9월 9일]] 결국 [[존 리드 하지]] 중장이 주도하였던 항복 조인식장에 나와서 항복 문서에 조인하게 되었다. 여기서 아베 노부유키는 점령군 사령관이던 [[존 리드 하지]] 중장에게 온갖 감언이설과 모략으로 조선 인민의 봉건적인 노예근성과 무지함을 역설하였고, 지배 통치의 간편함을 위한 부정적 조사 자료를 넘기기도 하였다. 이런 의도를 간파하지 못한 하지 중장은 조선에 "미군에 절대 복종하지 않으면 한반도의 독립은 늦어질 것이며, 이를 어기고 경거망동 할 시에는 엄히 처벌을 하겠다"는 무서운 경고성 포고문까지 발표하기도 한다. ||{{{#!wiki style="margin: -5px -10px" [youtube(L0q1kYyO3AA)]}}}|| || 1945년 9월 9일, 미군에 항복하는 마지막 조선 총독 아베 노부유키. || 이후 총독직을 사임하고 초대 미군정청장인 미 육군[[소장(계급)|소장]] 아널드 장군에게 [[조선]]의 행정권 등을 모두 이양하고는 일본으로 철수한다. 패전국 총독으로서 100만 명의 일본인을 무사히 귀국시킬 책임이 있었던 아베는, [[국민 여러분 안심하십시오|그 책임을 다하지 않고 자기 혼자 가족만 데리고 도망치다가 마침 폭풍을 맞아 부산으로 돌아오는 바람에 걸려 버린다.]] 이 해프닝으로 조선 거류 일본인들의 반감까지 샀다. 그는 철수 과정에서 마지막까지 조선을 쥐어짰다. 철수하던 총독부 관리들과 한국에 체류하던 일본인들의 본국 귀환비용을 마련하려고 엄청난 수의 조선은행권을 찍어낸 것이다. 이들이 인쇄한 구권 화폐는 해방후 인플레이션을 초래했고, 당시 돈을 가진 조선인들은 막대한 손해를 봤다. 이 자를 마지막으로 [[조선총독부]]는 마침내 공식 해산되었다.[* [[1945년]] 9월 [[미군]]이 [[서울]]에 진주하였을 때까지 만 35년, [[1905년]] [[을사조약]]으로 설치되었던 전신기관인 한국통감부 기간까지 포함하면 40년 동안 존속했다.] 일본으로 귀국한 이후 1953년 9월 7일에 사망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